― 탄광의 흔적과 박물관 도시가 주는 묵직한 스토리
- 지나쳤던 도시, 영월에서 멈추다
강원도 여행을 떠올리면 으레 동해 바다가 떠오른다. 속초, 강릉, 양양 같은 바다를 낀 도시들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향을 달리해 보았다. 바다도, 스키장도, 핫플도 없는 도시. 오히려 ‘없음’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영월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점점 도심을 벗어나 산을 가르고, 강을 따라 달렸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영월은 생각보다 조용했고, 생각보다 깊었다.
도착하자마자 시선을 끈 건 바로 산과 석회암 절벽이었다. 회색빛 바위가 드러난 산자락은 다소 거칠고, 묵직했다. 도시 전체가 고요한 분위기에 감싸인 듯했다. 어쩌면 이것이 영월이 가진 첫 인상이자, 그 정체성이 아닐까 싶었다.
도시 전체가 크게 들썩이지 않는다. 여행지 특유의 요란한 간판, 줄지어 늘어선 카페 거리도 없다. 대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느낌. 그리고 곳곳에 ‘박물관’이라는 표식이 붙은 작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영월은 그저 ‘지나치는 도시’가 아니라, 멈추어야만 느껴지는 도시였다.
- 탄광의 흔적, 그리고 기억의 공간들
영월이 한때 탄광 도시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광부들의 땀과 탄가루로 가득했던 도시였다. 지금은 대부분 폐광이 되었지만, 도시 곳곳에는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장릉 탄광 유적지였다. 인적 드문 산길을 조금 오르자 낡은 갱도 입구와 녹슨 철제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앞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지만, 철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과거의 시간을 그대로 담아둔 듯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서 있으면, 철모를 쓴 광부들의 발걸음 소리와 광차 굴러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기분이 들 정도다.
영월이 특별한 이유는, 이 사라진 산업의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이 도시는 ‘박물관’을 선택했다.
영월의 박물관은 거창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작고 단단한 공간들이 모여 도시의 과거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 영월역사박물관에서는 광부들의 사진과 유품, 작업복 등을 볼 수 있다.
📍 동강사진박물관에서는 폐광촌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한 전시가 열린다.
📍 책박물관은 산업과는 조금 다른 결이지만, ‘잊히지 않아야 할 것들’에 대한 공통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 도시의 박물관들은 유물의 공간이 아니라, 기억의 저장소다.
화려하진 않지만 진심이 담긴 장소들에서, 나는 어느새 영월의 과거와 마주하고 있었다.
- 별빛 아래서 도시의 속살을 보다
해가 지고 나서야, 영월이 가진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났다.
낮에는 역사와 산업의 무게에 눌린 듯했던 도시가, 밤이 되자 별빛 아래에서 조용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영월에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별 관측 명소인 별마로천문대가 있다. ‘별을 보는 마을’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이곳은 인공조명이 거의 없어 맨눈으로도 은하수가 보일 만큼 밤하늘이 깊고 선명하다.
천문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9시가 넘은 시각. 그곳에는 나처럼 별을 보러 온 여행객 몇 명과, 고요한 산바람뿐이었다.
望遠鏡(망원경)을 통해 본 달의 표면, 그리고 눈으로 본 북두칠성, 안드로메다, 별똥별 하나.
그 순간은 마치 도시가 잠시 숨을 멈춘 듯했다. 탄광의 어두운 갱도에서, 박물관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지금 이 별빛 아래에서… 영월은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 마치며 – 잊히지 않게, 그래서 남긴다
영월은 시끄럽지 않다. 화려하지도 않고, ‘인스타 핫플’도 없다.
하지만 그 고요함 안에는 묵직한 과거와, 잊히지 않으려는 진심, 그리고 별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나는 도시의 겉모습보다 속살이 중요한 여행이 있다는 걸 배웠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잊힌 것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빛나는 도시.
영월은 그런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남긴다.
잊히지 않게, 다시 들여다보게, 그리고 누군가 또다시 머무를 수 있게.